시대적 트랜드로 따져봤을 때 나는 온갖 문화의 수혜를 입었다는 90년생 시조새이다. 첫 줄부터 울컥한데, 나름대로 자랑거리다. 미국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았고, 일본문화, 대만문화도 접했고, 무엇보다 한국문화산업이 태동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 문화를 즐겼다는 점에서 시조새라는 걸 인정하기로 한다.
텔레비전을 어렸을 때부터 달고 살았던 나는 매일 종이신문에 "봐야할 TV프로"에 밑줄을 긋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음악 프로그램 보기는 아주 중요한 의식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가요톱텐, 나중에는 음악캠프, 인기가요... 그렇게 프로그램을 흡수해야 음악 업계 돌아가는 걸 알 수 있었기에(?) 내 모든 일과는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나의 음악 역사는 김원준과 함께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텔레비전에서 '잘생긴 사람'이 나온다는 걸 인식했던 7살. 나는 어른들에게 리모콘을 절대 내주지 않으며, 가요 무대를 기어코 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손범수 아저씨가 유희열을 닮은 것 같다.
가장 처음 샀던 음반은 아마도 젝스키스가 아닐까 싶다. 집 앞 문방구에서 카세트 테이프를 샀다. 파란색 속지가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사진을 기대했는데 웬 사진은 없고 미키마우스(?) 같은 그림만 그려져 있던 것 같다. 테이프가 닳도록 들었다. 나는 '폼생폼사'가 정말 멋진 곡이라고 생각했다. 아, '로드 파이터'도. 유치원 재학 시절, 그 곡만 떠올리면 배가 간질간질 했다. 은지원은 머리가 너무 짧아서 싫었고, 제대로 잘생긴 고지용과 웃는 모습이 예뻤던 강성훈을 좋아했다. 얼빠기질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젝스키스의 파이팅 넘치는 곡들을 좋아하다가, 늘 챙겨보던 음악 방송에서 S.E.S를 봤다. 처음 느꼈다. 덕통사고. 누구를 보고 반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언니들의 새하얀 통바지가 미치도록 예뻤다. 춤도 노래도 정말 좋았다. 'I'm Your girl'은 지금 생각해도 덕통사고 당할 만 곡이다. 그 유영진 특유의 샤랄랄라한 느낌에 약간의 비트 가미. 나는 코묻은 돈, 아니 엄마 돈을 SM에 갖다 바치기 시작했다. 브로마이드를 사서 집에 걸어 놓고 그 앞에서 기념샷을 찍었다. 뭣도 모르는 내 동생 녀석도 한 방 찍었다. 나는 매일 그 브로마이드를 어루만지며 동경과 즐거움과 뭐 그런 걸 느끼기 시작했다. 젝키도 좋아했지만 제대로 팬질을 했던 건 S.E.S 때부터였다. 아 물론 젝키도 계속 좋아했다. 영화 <세븐틴>도 봤으니까. 그 영화 청불로 기억하는데 아마 엄마가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줬..겠지?
그때부터 오매불망 S.E.S의 컴백을 기다리며 음악 방송에 미쳐가기 시작했다. 그냥 그 당시 나오는 가수들은 다 좋아했던 것 같다. 그러다 S.E.S 2집이 나왔는데 거의 뭐 신 추앙하듯이 좋아했던 것 같다. S.E.S의 2집 앨범은 (당시에 느끼기에) 정말 어썸했다. 언니들의 신비로운 이미지는 역시 내 뱃속을 간질간질 하게 만들었다.
언타이틀, 영턱스클럽, UP, 가리지 않고 다 좋아했다. 그러다가 내 나이 또래 대다수가 그랬듯, god에게 빠져버렸다. <육아일기>는 정말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다. god는 지금 생각해도 예능을 잘했던 그룹이다. 물론 박준형 오빠가 그렇게 웃긴 지는 오늘 날에야 처음 알았지만 말이다. 내 기억에 박준형 오빠는 팬페이지가 딱 2개였다. 손호영, 윤계상이 1,000개가 넘는 반면에 말이다. 아무튼 본능에 충실했던 나는 호상커플(손호영&윤계상)과 덴우커플(데니&김태우)를 적극 지지했고 손호영을 짝사랑 했다. 역시 돈을 갖다 부었다. 초딩 고학년이었던 나는 정말 적극적으로 돈을 부었던 것 같다. FAN g.o.d는 왜 안 가입 안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엄마한테 맞을까봐 그랬나. 멤버들 생일도 챙겼다. 드림콘서트도 갔다. god 스티커도 사고 편지지도 사고 팬 아트 물품을 졸라게 샀다. 우상 숭배하듯이 좋아했다.
그 나이대가 또 누구를 엄청 싫어하게 되는 나이인가 보다. 나는 god와 라이벌로 추정되는 가수들을 졸라게 까고 다녔다. H.O.T를 증오했고 (더군다나 나는 젝키 골수팬이었지 않나) 1위 후보에 같이 오르는 모든 경쟁 가수들을 까고 다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까'도 '빠'였음을. 관심이 많았던 거다. 유승준도 은근히 좋아했고, 샤크라도... 샤크라는 잘 모르겠다. 당시에도 나는 힙합을 꽤 좋아했다. 힙합바지가 간지의 정석이라고 생각했다. 원타임 같은 경우 노래를 정말 좋아했던 것 같다. 아, 백지영 언니도 내 비밀번호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나는 백지영 언니를 진! 짜! 좋아했다. 얼굴과 노래가 둘 다 되는 가수를 처음 봤다고 생각했다. 라이브를 한 번 보고 "와 ㅅㅂ 저게 가능해?" 라고 경악했다. 당시 가수들 립싱크 한다고 사람들이 뚜드려 패던 시절이다. 붕어라고 막. 그런데 백지영은 춤추면서 라이브 작살나게 했다.
지금에서야 떠오르는 기억 하나는 보아에 대한 나의 삐뚤어진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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